“신여성 나혜석 생가 터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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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11-01-19 01:06
입력 2011-01-19 00:00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정월 나혜석(1896~1948) 선생의 생가가 복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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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연합뉴스
나혜석
연합뉴스
경기 수원시는 2013년까지 45억원을 들여 나혜석 생가와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올해 토지매입비 7억 6500만원을 확보했다고 18일 밝혔다. 시는 이를 위해 선생이 태어난 지금의 팔달구 신풍동 47 일대를 대상으로 생가터를 찾기 위해 탐문을 벌이고 있으며, 국가기록원에 1911년 당시의 지적도 공개를 요청했다. 또 나혜석 부친 나기정의 호적 변동사항과 토지이동 내력 등을 파악하고 후손과도 접촉, 구체적인 생가위치와 규모 등을 파악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시는 생가 위치가 확인되면 토지를 매입하고 후손, 기념사업회, 미술가협회 등을 중심으로 협의체를 구성, 생가복원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도출할 예정이다.

시 관계자는 “수원의 대표적 인물인 나혜석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이 같은 사업을 펼친다.”고 말했다. 나혜석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에서 군수의 딸로 태어났으며 서울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했다. 특히 3·1 운동에 연루돼 다섯 달 동안 옥고를 치렀고 1921년 남편의 부임지인 만주 안동현으로 갔을 때는 부영사의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며 야학을 개설하는 등 민족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34년에는 여성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봉건적 인습에 젖은 사회를 고발하는 ‘이혼 고발장’을 발표하고 남편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내면서 세간을 들끓게 했다. 이혼의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 시험결혼이 필요하며 이 기간에는 산아제한이 필요하다는 혁신적인 주장도 내놓았다.

그러나 이처럼 급진적인 주장에 당시 사회는 차가운 반응을 보였고 이혼 후 절과 양로원, 딸의 집 등을 전전하며 궁핍한 가운데 미술활동을 하다가 결국 시립자제원의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국학자료원은 2001년 그가 남긴 그림과 판화작품, 소설, 희곡, 시, 수필 등을 모아 ‘원본 정월 라혜석 전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수원시는 이듬해 8월 팔달구 인계동 중심상가 도로(440m)에 동상과 분수대 등 조형물을 세우고 ‘나혜석거리’로 명명했으며 매년 나혜석 거리예술제를 열고 있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2011-01-1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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