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숙 칼럼] 무한 반복되는 ‘권력도취병’

최광숙 기자
수정 2025-11-26 03:45
입력 2025-11-26 00:58
역대 정권, 권세 영원할 듯 착각
권력 마구 휘두르다 몰락의 길
순리·법치 저버리면 예외 없이
후과 따른다는 게 역사의 교훈
최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국회에서 청년 전세대출 정책예산 감액 문제와 관련한 야당 의원의 질의에 “왜 내 딸을 거명하냐”며 고성을 지르고 항의하다 여당 원내대표로부터 혼쭐이 났다. 평소 점잖아 보이던 그가 회의 참석자들이 여러 차례 말릴 만큼 격앙된 모습을 보이자 관가에서 “사람이 변했나”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의 예상치 못한 ‘변신’을 두고 야당 최고위원은 “김 실장이 술 취했나 싶었는데, 권력에 잔뜩 취해 있었다”며 맹폭했다.심리학자인 대커 켈트너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교수는 ‘권력이 높아질수록 사람은 자제력을 잃고 사회적 규범·윤리를 무시하는 행동이 늘어날 수 있다’고 했다.
권력에 취하는 것은 정치 집단을 빼고는 얘기하기 어렵다. 기자는 1990년대부터 국회를 출입하며 3김 시대 권력의 부침을 지켜봤다.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서 권력의 유효기한은 한정돼 있는데도 집권세력은 마치 천년만년 권세를 누릴 것처럼 착각하다가 험한 꼴을 당하곤 했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전임 정권의 몰락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똑같은 불행을 반복하는 것은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전 대통령은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문빠의 열렬한 지지 속에 브레이크 없이 질주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 부작용, 집값 폭등 등으로 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고도 보수세력 척결을 위해 적폐청산에 올인했다.
다른 부처는 차치하고 국정원만 보더라도 40여명이 구속되고, 300여명이 검찰 수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완장’을 차고 공직사회의 반대 세력까지 거세게 몰아세웠지만 결국 정권은 보수로 넘어갔다. 문 정부 초기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민주당 20년 집권론’도 그렇게 허언으로 끝났다.
앞뒤 안 가리고 제멋대로 국정을 밀어붙인 것은 윤석열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충암고·서울법대 동문과 검사 출신을 ‘묻지마’ 중용하더니 현실성 없는 의대 2000명 증원,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등을 막무가내로 강행했다. 그 거침없는 기세에 누구 하나 말리지 못했다.
부인 김건희의 전방위 국정 개입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자신들의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 없이는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이들 부부의 행태는 최근 특검을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윤·김 부부는 절제되지 않은 권력의 말로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12개 혐의로 재판을 받던 이재명 대통령은 윤 전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인 자폭 계엄으로 기사회생해 정권을 잡았다. 이 대통령은 임기 초 실용주의 표방과 야당과의 협치 자세로 국민들에게 기대감을 심어 주고 외교적 성과도 올렸으나 최근 지지율 하락 국면을 마주했다. 그 배경에는 7000억원대 불법 수익금 환수를 포기한 검찰의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 항소 포기, 사법부 장악 시도 등 이 대통령의 사법리스크 관리를 위해 사법시스템을 파괴하고 있다는 국민적 우려와 비판이 깔려 있다.
게다가 요즘 내란 가담자를 색출한다며 공무원 75만명의 핸드폰을 뒤지고 동료 공무원들의 제보·투서를 받겠다고 나섰다. 문 정권 때의 적폐청산이 울고 갈 정도의 권력 폭거라는 게 관가 분위기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와 추미애 법사위원장 등 강경파의 입법부 권력 휘두르기는 자신들의 ‘끗발’이 영원할 것처럼 과거 정권의 구태를 넘어 한발 더 나가고 있다.
진보 진영의 원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얼마 전 저서 출판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재명 정부의 위험 요인으로 주변인들의 ‘권력도취’를 지적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대통령 지지율이 높을수록 주변 사람들이 (권력에) 도취해서 그 자리를 너무 즐기고 남들은 못 오게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브레이크 없는 권력의 일방 질주는 말로가 좋지 않았다. 권력을 쥐고 흔들 때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5년 천하’가 끝날 때 세상의 순리와 적법 절차에 따르지 않은 일에는 무서운 후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국민들의 민주 의식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정치권에는 여전히 ‘권력도취병’ 환자들 천지다.
최광숙 대기자
2025-11-2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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